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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보우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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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보우국사

▶ 한국 불교사에 있어서의 태고국사의 지위

 

 

태고보우국사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신 일대사인연이란 오직 중생의 교화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생들의 근기는 너무나 각양각색이라 그에 대응하는 부처님의 교화방법도 다양하였으니 교화에 대응하여 나투신 몸을 천백억의 화신이라하고 그 나타내보이신 법을 팔만사천의 법문이라 했습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지 1천6백여년이라는 유구한 역사의 흐름속에서 우리의 독특한 지역성, 시대성,민족성,문화성 등을 가늠하여 수 없는 방편이 더해지고,덜 해지면서 종파들이 성립되었으니 이를 불교의 교단적인 내면에서 볼 때에 교리의 달사와 종파의 변천사가 된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교리의 발달과 종파의 변천이라는 역사적인 면에서 볼 때에 보우국사가 처 하였던 시대적배경과 사상적위치는 참으로 획기적인 중요성을 가졌다하겠습니다.
태고국사 이전의 우리나라불교는 흔히들 『오교구산(五敎九山)』으로 불리어져 왔습니다. 이 5교9산에 대하여는 그 교리의 발달,선양면에서 또는 종파의 성립과 변천의 면에서 앞으로 많은 고증과 연구가 더 있어야하겠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삼국시대 이 후 특히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오는 동안 교리적으로나 종파적으로나 많은 변천 과 분파가 있었던 것은 뚜렷한 사실이라하겠습니다.
불교의 이런 종파적 분립은 한때 불교의 저변확대를 이루어 종지의 선양과 교세의 확장을 가져오는데 큰 구실을하였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차차 말기로 내려오면서 도리어 분립으로 인하여 모순과 대립이 심하였으니 그것은 부처님의 제자이면서도 이교도 이상으로 서로 배척을 일삼기만 하여서 그 결과는 한 국민으로서의 사상에 까지 혼란과 대립이 극심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태고국사께서는 이러한 시대적 폐단을 절실하게 느낀 나머지 이의 지양에 힘쓰셨습니다. 그것은 국사의 수행기에 있어서도 어느 한 종파 특히 선(禪)과 교(敎)에 치우 치지 않고 폭넓은 수행을하였고 따라서 왕사,국사가된뒤 종파정책의 시행에 있 어서는 원륭부를 두어 구산원륭오교홍통(九山圓隆五敎弘通)에 힘을 다하였습니다.
태고국사의 이러한 행적은 그 시대적폐단을 구하려는 한 방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이 국사 이후 우리나라 불교계의 한 지표가되었으니 이는 한국불교가 선과 교를 겸수한다는 독특한 사상이 형성되었던 것이며 또한 국사께서 종파의 원륭을 도모 한 정책은 그뒤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국사의 본뜻과는 다른 측면에서이지만 국가적 정책으로 여러종파의 통합을 강행하였으니 태종이후에는 선종,교종만을 인정하여 조선말기까지 내려오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에 국사이전의 우리 불교계는 여러종파로 갈리어 성립되어서 각종파 마다 종조(宗祖)와 종지(宗旨)와 종도(宗徒)와 종세(宗勢)가 따로 있었지마는 국사 이후에는 국사의 수행관과 원륭정책에 의하여 종파를 총괄하려는 사조사 형 성되었고 더구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국가적정책에의한 여러 종파의 통폐합이 행하여졌기 때문에 종전처럼 각기 종조와 종지와 종도와 종세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나라불교는 국사이전은 소위 『오교구산』이 각기 성립하여 발전하던시기이고 국사로부터 이후는 여러종파를 포괄하여 원륭하는 시기라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태고국사는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그 수행관으로보나 종파정책상으로보나 중흥조의 위치를 확보하였고 따라서 오늘날의 한국 불교도는 국사의 사상과 법 통을 계승한 문손들뿐입니다

 

 

▶ 태고국사의 사상

 

 

 태고국사의 사상은 너무나 거룩하고 커서 감히 무엇이라 단적으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을 간추려 보면 다음 몇가지로 요약된다.

첫째,국사께서는 수행이나 종파정책의 면에서 선과 교 어느한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겸수일치시킨 자세였다. 위의 행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먼저 국사의 수행면을 보면 국사께서 19세에 일찍이 선지를 탐구하였지만 동시에 교학도 연구하여 26세에 화엄선에 합격하였고 37세에 원각경을 보고 깨달았으며 38세에 無字화두로서 견성하는등 선과 교를 겸수하여 크게 성취하였다. 따라서 이후부터 선과 교의 겸수는 한국불교도의 수행에 큰 표본이 되었으며 한국불교의 특징을 이루었다.
또 국사의 종파정책면을 보면 공민왕의 왕사가 되던 때에 국가의 일을 진언하면서『9산원륭5교홍통』을 주장하고 원륭부까지 설치하여 여러 제종포괄에 힘을 기울이면서 불교의 근본정신으로 회통하고 국민의 사상 순일에 이바지하였다. 국사의 이러한 운동은 불교의 종파이기이전에 먼저 한 부처님의 제자인 것이요 한 종파의 사람이기 이전에 한 나라의 백성임을 스스로 깨닫자는 것이었다. 이는 종교인으로서 크게 명심해야할 문제점이라하겠다.
둘째. 세간과 출세간의 도리를 원륭한 것이다. 행적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국사께서 부모님에 대한 효양을 보자 종전의 출가승들은 대개 할애사친(割愛辭親)이라하여 부모친척을 멀리하는 것을 수도의 요체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국사께서는 출가수도의 목적이 4가지의 은혜를 갚는데 있음을 알아서 38세에 견성오도한후에 제일먼저 부모를 찾아가 효양에 힘썼으며 또 왕사,국사가 된 뒤에는 그 영예를 전부 부모와 향리에 돌리어서 부모가 모두 직위를 얻었고, 부모의 고향이 승격되었다. 철저한 효양이었다.
또 국사께서 국가에 대한 봉공의 정신을 살펴보면 행적에서 본 바와 같이 국사께서 공민왕의 지우(知遇)를 받은 이후 공민왕의 왕사로서 16년간 공민왕,우왕 두왕조의 국사로서 12년간 봉직하면서 위로는 국왕의 마음을 순화하여 선정을 베풀게하고 아래로는 백성의  복리증진에 이바지하기에 전생애를 바치었다.
국사께서는 이렇게 부모에 대한 효양과 국가에대한 봉공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치면서도 한편으로는 출가한 사람의 본분을 잊지 않아서 세상의 부귀나 권력에 취하지않고 주로 용문산 소설암에 살면서 진세(塵世)에 조금도 물들지 않았다. 이는 출세간에 있으면서도 세간을 버리지 않고 또 세간에 출입하면서도 출세간에 철저한 것이니 이는 참으로 진리를 통달한 고승이 아니고는 하기 어려운 일이라하겠다.
셋째.국사께서 중국에 외유한 일이다. 행적에서 본 바와 같이 국사께서 46세에 원나라에 건너갔을 때 명성이 널리 퍼져서 석옥청공선와 같은 고승으로부터 심계를 받았고 원나라 황제의 특수한 우대를 받아 몇차례 법회를 주관하였고 永寧禪寺의 주지로 개당까지 하였다.
이 외유는 국사께서 자신의 깨달음에 대하여 증명을 구하는데 주안이 있었으므로 약2년간의 외유를 마치고는 본국에 돌아왔다. 외유란 흔히 외국화 되 쉽고 외국문화에 심취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국사께서는 그러한 자세에서 벗어나 우리의 우수성을 도리어 과시하고 그러면서도 많은 견문을 넓히고 돌아온 점은 우리들이 영원히 존경하고 본받을 위대한 모범이라하겠다.
끝으로. 태고보우국사법어집은 국사께서 원나라 永寧禪寺에서 개당한 법어를 비롯하여 본국에 돌아온뒤 봉은사등 여러 큰절에서 개당한 법어와 그리고 위로는 공민왕,우왕과 아래로는대신과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교화로 80평생을 바치신 법어들을 모아 엮은 것으로서 국사의 사상을 연구하는데 가장 귀중한 자료가됨은 물론이요 당시의 불교사를 연구하고 시대성과 사회상을 고찰하는데 있어서도 막중한 사료(史料)가 된다고하겠다.
더욱이 고려말기에 있어서 학문과 예의범절로서 가장 이름이 높은 목은 이색,도은 이숭인, 포은 정몽주(三隱)들이 모두 국사의 법어집을 존중한 나머지 각기 서문과 발문을 썼음은 이 법어집의 고귀성을 한층더 보여준 것이라하겠다.

 

 

▶ 태고국사의 행적

 

 

 태고국사께서는 고려 충렬왕 27년(1301)에 경기도 양근에서홍주홍씨 延을 아버지로 삼한국대부인 정씨를 어머니로하여 탄생하였다. 탄생할 때에 어머니의 꿈에 해가 품에 들어오는 태몽이 있었다하며 어릴적부터 영특하고 준수하여서 법왕아(法王兒)로 불리었다.
13세때에 양주 회암사에서 광지선사를 스승으로 득도, 19세때에 가지산총림에서『만법귀일』의 화두로서 禪旨를 참구하였으며 교학의 연구에도 힘을써서 26세때에 華嚴選에 합격하였다.
30세때에는 출가장부의 큰 서원을 세워 대도를 성취하고 교계와 사회의 정화에 심신을 바치고자 용문산 상원사에서 관세음보살님께 기도를 올리어 12가지의 큰 서원을 세웠으며 33세때에는 일대사인연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죽음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로서 성서 감로사에서 7일동안 먹지도 않고 잠자지도 않으며 용맹정진한뒤에 지혜가 크게 열리었으며 37세때에 불각사에서 원각경을 보다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으며 38세때에 전단원(栓檀園)에서 無字화두로 의문을 크게 타파하여 견성오도하시었다.
그후 고향 양근으로 돌아가 효성을 다하였으며 41세때에 삼각산 중흥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절 동쪽에 태고암을 짓고 오랫동안 주석하였다. 46세때에 중국으로 건너가 약2년동안 수행하며 다니던중 원나라 황제로부터 특별한 우대를 받아 몇차례 법회를 주관하였으며 또 임제선사의 18대법손으로 당시 중국에서 으뜸가는 고승인 석옥청공선사를 만나 심계(心契)를 얻었다.
48세때에 본국으로 돌아온뒤 용문산에 소설암이라는 암자를 짓고 정양(靜養)하던 중 공민왕의 부름을 받아 52세때에 경용사에 주석하였으며 56세때에 봉은사에서 開堂하였으며 이어 왕사로 책봉되었고 원륭부를 설치하여 9산원륭5교홍통에 힘썼으며 71세때에 국사로 책봉되었고 81세때에 우왕에 의하여 다시 국사로 책봉되는 등 왕사로서 16년 국사로서 12년동안 봉직하다가 82세(우왕8년,1382)에 세연을 마치었으니 세수 82세 법랍  6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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